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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저는 엔화가 싸다는 걸 처음엔 그냥 '여행 가기 좋은 타이밍'이라고만 받아들였습니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을 준비하다가 환전 창구에서 숫자를 보고서야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때도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부끄러운 인식이었습니다. 엔화 약세의 뒤에는 일본 중앙은행의 딜레마, 미국과의 금리 차이, 그리고 1조 2,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가 얽혀 있었습니다.
금리차, 엔화가 무너진 진짜 이유
제가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뒤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한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환율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힘의 균형 위에 놓여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핵심은 미국과 일본 사이의 기준금리 격차였습니다. 기준금리란 중앙은행이 시중 은행에 돈을 빌려줄 때 적용하는 기본 이자율로, 한 나라의 자금 흐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기초적인 숫자입니다. 2022년 초만 해도 미국은 0.25%, 일본은 -0.1%로 두 나라의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물가 급등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5.25~5.5%까지 올리는 동안 일본은 사실상 제자리였습니다. 금리 격차가 순식간에 5.5% 포인트 이상으로 벌어진 겁니다.
돈은 항상 더 높은 수익을 찾아 움직입니다. 일본의 연기금, 금융기관, 개인 투자자들이 일본 안에서 돈을 굴려봤자 이자가 거의 나오지 않으니, 미국 국채를 사고 미국 주식을 담는 쪽으로 자금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거래가 반복되면서 엔화를 팔려는 힘은 커지고 사려는 힘은 줄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던 2011년에 달러당 80엔이었던 환율이 157엔까지 올라온 건 이런 구조적 압력이 10여 년에 걸쳐 쌓인 결과입니다(출처: 일본은행(BOJ) 공식 사이트).
여기에 더해 일본 기업들이 이미 공장을 해외로 이전한 뒤, 해외에서 번 수익을 일본으로 들여오지 않고 재투자하는 구조도 엔화 약세 압력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수출로 달러를 벌어들이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입니다.
일본 중앙은행의 딜레마
엔화 약세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제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금리를 올리면 되지 않냐는 단순한 질문에 일본은행(BOJ)은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꽤 무겁습니다.
일본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4%로, 전 세계 1위입니다. 비교하자면 한국의 부채 비율은 약 50% 수준입니다. 월급보다 빚이 두 배라는 상황인 셈입니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이어진 저성장, 거기에 겹친 급격한 고령화가 연금·의료·요양 지출을 폭발적으로 키운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 국채를 일본은행(BOJ)이 약 50%, 국내 은행이 31%를 들고 있다는 구조입니다. 국채(Government Bond)란 정부가 자금을 빌리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으로, 일정 기간 뒤 이자와 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증서입니다. 금리가 오르면 기존 국채 가격은 떨어집니다. 시장에 더 높은 이자를 주는 신규 국채가 나오면, 낮은 이자를 주는 기존 국채를 가격을 낮춰야만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행이 보유한 수십 조 엔 규모의 국채 가치가 동시에 줄어드는 겁니다.
거기에 일본은행이 국채 매입 규모를 줄이기 시작하면, 국채시장의 가장 큰 수요처가 빠지면서 국채 가격은 더 떨어지고 금리는 더 오릅니다. 일본 정부는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를 다시 발행할 때마다 높아진 금리를 적용해야 하니 이자 부담이 커집니다. 엔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면 국채시장이 불안해지고, 국채시장을 안정시키려고 금리를 낮게 유지하면 엔저가 고착화되는 구조입니다.
- 엔저 방어를 위해 금리 인상 → 기존 국채 가격 하락, 이자 부담 증가
- 국채시장 안정을 위해 저금리 유지 → 엔화 약세 고착화
-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 축소 → 국채 수요 감소, 금리 추가 상승 압력
미국이 일본을 돕는 이유,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미국이 일본의 엔저 방어에 직접 개입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이게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이익과 관계없이 일본을 도와준다는 그림이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었습니다.
핵심은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 규모입니다. 일본은 약 1조 2,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들고 있는 전 세계 최대 보유국입니다(출처: 미국 재무부 TIC 데이터). 일본이 엔저를 막기 위해 달러를 확보하려 한다면, 이 국채를 매각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국채가 시장에 대량으로 풀리고 국채 가격은 떨어지며 금리는 올라갑니다. 그 연쇄 작용으로 미국 시중 금리와 주택담보대출 금리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시나리오가 엔캐리트레이드(Yen Carry Trade) 청산입니다. 엔캐리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저렴하게 자금을 빌려 금리가 높은 해외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전략입니다. 일본의 기준금리가 오르면 투자자들은 해외에 투자해 뒀던 자산을 서둘러 매각하고 엔화로 갚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 국채도 함께 매각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결과는 앞서와 같습니다. 미국 국채 금리 상승, 시중 금리 상승,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입니다.
최근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가 회의 중 메모에 '엔화 개입 50~100억 달러'라고 적은 내용이 외부로 노출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실수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베센트는 1990년대 조지 소로스와 함께 파운드화에 베팅해 막대한 수익을 낸 전력이 있는 투자계 거물입니다. 그런 인물이 실수로 메모를 노출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 사진이 유출된 시점에 엔화 가치가 5% 올랐습니다. 제 생각에는 의도된 시장 신호로 보는 쪽이 설득력 있습니다. 물론 단순 실수였다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원화와 엔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일본 여행에서 여자친구가 가방을 저렴하게 산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제 경험상 엔화 약세는 분명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시각으로 그 여행을 돌아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저렴하게 사들인 그 뒤에는, 수입 물가가 올라 생활비가 압박받는 일본 청년층이 있었다는 겁니다.
일본은 에너지와 식품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합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물건을 사는 데 더 많은 엔화가 필요합니다. 이 부담은 자산을 가진 노년층보다 월급으로 생활하는 청년층에게 훨씬 크게 체감됩니다. 금융자산의 60%를 노년층이 보유하고 있다는 2019년 조사 결과를 고려하면, 국채 이자는 고령층에게 돌아가고 물가 상승 부담은 젊은 세대가 짊어지는 구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화 역시 엔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원화와 엔화는 동조화 현상을 보여왔습니다. 쉽게 말해 엔화가 떨어지면 원화도 함께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2024년 7월 SK하이닉스 ADR(미국 주식시장에 외국 기업이 상장하는 방식)이 나스닥에 상장되면서 약 265억 달러가 국내로 유입돼 원화 가치가 7% 반등했고 동조화가 일시적으로 깨졌습니다. 그러나 이 자금이 소화되고 나면 원화는 기존의 압력을 다시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당시 외환시장에서는 분석했습니다. 구조적인 원인, 즉 해외 투자 확대와 달러 수요 증가 흐름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엔화 뉴스를 볼 때 단순히 '여행 타이밍'으로 판단했던 제 과거 시각이 많이 달라진 건, 이 모든 게 결국 글로벌 자금 흐름 안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엔화가 싸면 일본 여행 가기 좋은 거 아닌가요?
A. 여행자 입장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이 쓸 수 있으니까요. 다만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 일본 내 수입 물가가 오르고 현지 생활자들의 부담이 커지는 쪽면도 있습니다. 좋은 타이밍이라고만 보기엔 그 이면이 꽤 무겁습니다.
Q. 일본이 금리를 올리면 엔화 문제 바로 해결되는 거 아닌가요?
A. 금리를 올리면 엔저 압력이 줄어드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일본은행이 국채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어서, 금리가 오르면 그 국채 가치가 동시에 하락합니다. 또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이 촉발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 충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금리 하나만 올린다고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Q.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이 왜 미국에도 영향을 주나요?
A. 엔캐리트레이드로 해외에 투자된 자금 중 상당 부분이 미국 국채와 주식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금리가 오르면 투자자들이 이 자산을 매각해 엔화로 상환하는 과정에서 미국 국채 가격이 하락하고 금리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 여파가 미국 시중 대출 금리로 이어지는 연쇄 구조입니다.
Q. 엔화 약세가 원화에도 영향을 주나요?
A. 오랫동안 두 통화는 동조화 흐름을 보여왔습니다. 엔화가 약세일 때 원화도 함께 약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만 SK하이닉스 ADR 상장처럼 대규모 달러 유입이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이 흐름이 깨지기도 합니다. 구조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한 동조화는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결론
제가 이번에 엔화 약세를 들여다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환율은 결코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금리차가 핵심 원인인 건 맞지만, 그 뒤에 국가부채, 엔캐리트레이드, 미국 국채시장, 그리고 원화까지 연결되는 구조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환율 뉴스를 볼 때 '금리가 올랐다', '엔화가 떨어졌다'는 숫자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숫자를 움직이는 자금의 흐름과 각국의 이해관계를 함께 살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엔화 약세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일본 경제 상황과 BOJ의 금리 결정, 미국 국채 시장의 흐름을 주기적으로 확인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