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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가 세계 정유 능력 5위라는 말,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수치를 직접 찾아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중동 분쟁으로 전 세계가 기름 대란을 겪는 와중에 국내 주유소가 평온했던 이유,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세계 정유 5위, 숫자 뒤에 진짜 의미가 있었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마다 리터당 가격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출퇴근 거리가 길다 보니 기름값은 저에게 월세 다음으로 신경 쓰이는 고정 지출입니다. 그래서 중동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번에 기름값 또 오르겠구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국내 주유소 가격이 요동치지 않았고, 줄 서서 기름을 넣는 광경도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제 유가가 오르면 국내 가격도 따라 오른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 경험상 이번만큼은 그 공식이 딱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파고들다 보니 정제 마진이라는 개념이 핵심이었습니다. 정제 마진(Refining Margin)이란 원유를 사들여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석유 제품으로 가공한 뒤 판매했을 때 남는 이익을 의미합니다. 원유 가격이 오른다고 바로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되는 게 아니라, 정제 단계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최종 가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한국의 강점이 드러납니다. 국내 정유 4 사인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은 2007년 이후 시설 고도화에만 34조 원을 투자했습니다. 특히 고도화 설비(Upgrading Unit)에 집중 투자했는데, 고도화 설비란 정제 과정에서 남는 잔사유(찌꺼기)를 다시 가공해 휘발유나 경유로 전환하는 장치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버려지던 재료를 다시 써먹는 능력입니다. 덕분에 원유 한 배럴에서 뽑아낼 수 있는 고부가가치 제품의 비율이 다른 나라 정유사들보다 높습니다.
그 결과가 숫자로 확인됩니다. 국내 정유 제품 생산량은 1960년대 하루 3만 3천 배럴에서 2024년 기준 336만 3천 배럴로 늘었습니다. 반세기 만에 약 100배 성장한 수치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한국은 미국 서부 지역에 항공유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텍사스산 원유를 미국 서부로 운반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정제한 항공유를 수입하는 편이 더 저렴하기 때문입니다(출처: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
세계 5위라는 순위가 처음엔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위 중국, 2위 미국, 3위 러시아, 4위 인도가 모두 산유국이자 인구 대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수 시장 규모와 원유 생산이 뒷받침되는 나라들 사이에서 자원도 없고 땅도 좁은 나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례적인 사실이었습니다.
- 정제 마진(Refining Margin): 원유를 석유 제품으로 가공 후 남는 이익. 공급 부족 시 급등
- 고도화 설비(Upgrading Unit): 잔사유를 고부가 제품으로 재전환하는 핵심 장치
- 2007년 이후 국내 정유 4사 시설 투자액 누계 34조 원
- 1960년대 대비 2024년 생산량 약 100배 성장
정제 마진 호황, 그 이면의 구조적 위험
중동 분쟁 이후 전 세계 정유 시장 상황을 살펴보면서 제가 예상 밖이었던 지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원유 공급은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는데, 정제유 공급은 그보다 훨씬 더디게 회복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데이터 분석 업체 케플러(Kpler)에 따르면 걸프만 산유국들의 원유 일일 선적량은 전쟁 이전 수준의 약 80%까지 회복됐습니다. 케플러는 위성으로 전 세계 유조선을 실시간 추적해 원유 흐름을 분석하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JP모건은 중동의 정제유 수출량이 같은 시기 전쟁 이전 대비 58%밖에 회복되지 않았다고 분석했습니다(출처: JP모건). 원유는 배에 실려 오는데 그걸 실제로 쓸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정제 능력이 전 세계적으로 부족해진 것입니다.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정유 시설이 타격을 입어 디젤 수출이 제한됐고, 중국은 자국 내 수요를 이유로 정제유 수출을 줄였습니다. 미국과 유럽은 친환경 전환 기조 속에서 노후 정유 공장들을 이미 폐쇄한 상태였습니다. 공급 부족이 겹치면서 미얀마는 배급제를 시행하고, 필리핀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외국 항공기 급유를 제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 마진은 크게 높아졌습니다. S-OIL의 배럴당 정제 마진은 41달러로, 미국 대형 정유사 발레로(Valero)보다 2달러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정유 부문 영업이익만 2조 원에 달하고, 전체 영업이익이 10조 원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삼성이나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들이 속하는 '10조 원 클럽'에 정유사가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한 가지 구분해야 한다고 느낀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내 정유사가 높은 이익을 낸다고 하면 산업 전반이 탄탄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국내 정유 4사의 2007년부터 2024년까지 누적 매출이 1,841조 원에 달하지만, 같은 기간 평균 영업이익률은 1.7%에 불과합니다. 제조업 평균 영업이익률 6.5%는 물론이고, 도소매업 평균 4.8%보다도 낮습니다. 평시에는 매출 규모와 달리 수익성이 극도로 낮은 구조입니다.
여기에 재고 위험이 더해집니다. 재고손실(Inventory Loss)이란 원유를 높은 가격에 매입해 두었다가 정제가 끝나기 전에 국제 유가가 급락할 경우 장부상 손실이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이란 분쟁이 빠르게 진정된다면, 원유 가격 폭락으로 수천억 원대 적자가 순식간에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호황이 구조적 경쟁력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정상적 시장 상황에 따른 일시적 수혜인지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너지 안보(Energy Security) 측면에서도 짚어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에너지 안보란 국가가 경제·사회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뉴질랜드가 2022년 비용 절감을 이유로 자국 내 유일한 정유 공장을 폐쇄했다가 이번 분쟁 이후 SK이노베이션에 안정적 공급을 요청하러 달려온 사례는 에너지 안보를 경제 논리만으로 따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잘 보여줍니다. 제 경험상 비용이 싸다는 이유로 핵심 인프라를 포기하는 결정은 위기 상황에서 반드시 후회로 돌아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한국 기름값이 다른 나라보다 덜 오른 이유가 뭔가요?
A. 일반적으로 정부의 유류세 인하 정책 때문이라고만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고도화 정제 설비를 갖춘 국내 정유사들이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원유 확보와 정제 능력이 동시에 뒷받침되지 않으면 세금을 낮춰도 공급 부족 사태를 막기 어렵습니다.
Q. 정유사 수익이 높으면 소비자한테도 좋은 건가요?
A.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제 마진이 높아진다는 것은 정유사 입장에서는 수익 개선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연료비와 물류비 부담이 함께 오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만 공급 자체가 원활하게 유지된다면 기름 대란 상황보다는 낫습니다. 수익성과 공급 안정성을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Q. 원유 가격이 내려가면 정유사에게도 좋은 거 아닌가요?
A.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높은 가격에 원유를 미리 매입해 정제 중인 상태에서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 재고손실이 발생합니다. 이를 재고손실(Inventory Loss)이라 하는데, 실제로 국제 유가 하락기에 국내 정유사들이 수천억 원대 적자를 기록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Q. 한국이 정유 강국이 된 게 정말 박정희 때문인가요?
A. 1964년 울산 정유 공장 건설이 출발점이 된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SK에너지가 운영하는 울산 CLX의 전신이 그 공장입니다. 다만 그 이후 수십 년간 민간 정유사들이 자체적으로 34조 원 이상을 고도화 설비에 투자한 결과가 오늘날 경쟁력의 실체입니다. 시작점과 현재의 경쟁력은 구분해서 평가해야 합니다.
결론
정유 산업을 찾아보기 전까지 저는 기름값이 안정적이면 그냥 다행인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정성 뒤에 수십 년간의 설비 투자와 기술 축적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주유소 가격판을 보게 됐습니다.
다만 지금의 경쟁력을 자부심으로만 소비하기보다는, 이것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너지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고, 국제 정세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정유 산업에 관심이 있다면 정제 마진 추이와 국내 정유사들의 고도화 설비 투자 현황을 함께 지켜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